이 세상의 단면
김대규 장로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서울의 아현동 신촌을 지나는 버스 안에는 비슷한 풍경이 그려지고 있다. 신촌지역에는 4개 대학과 6개의 중고등학교가 있다. 그래서 통학 시간의 버스 안은 일반인 대학생 중 고교생들로 꽤 붐비는 편이다. 오래 전에는 창가로 스치는 거리의 모습들을 보거나 동료들과 조잘대며 또는 책을 보거나 머릿속에 있는 생각, 그리는 꿈에 묻혀 각기 다른 모습이었지만 하나가 되어 각자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조그마한 가정과 사회와 나라를 보곤 했었다. 최근에도 버스 안의 모습은 아주 많은 변화는 없지만, 이어폰, 셀 폰을 들고 분주한 개인만이 보인다. 하나가 되어 스쳐 가는 풍경을 본다든지 정담이 있다든지가 아니다. 바쁜 개인이 보이는 모습은 있지만, 그전과 같이 작은 가정 사회 국가를 느낄 수가 없다.
세월이 많이 흐른 까닭이라고만 하기에는 어딘가 서글픈 느낌이 든다. 낭만이 있고 순수성이 드러나고 어설픈 면도 있었던 옛 모습이 그립다. 그 당시는 끈끈한 정과 신뢰와 구수한 맛의 인간미가 엿보였다. 작든 크든 공동체 안에서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경쟁대상이면서도 그보다는 형 아우 언니 동생이 앞섰던 의리와 섬김과 연민이 있었다고 하겠다. 지금의 개인 중심의 문화와는 차이가 있다 요즈음의 세상을 한 예로 말한다면 같은 공간에서 서로의 얼굴을 맞대고 일을 하면서도 대화보다는 신속하고 효율적인 것을 추구키 위해 네트워크, 텍스트, 카톡 방을 활용한다. 종일 별 대화 없이도 잘도 지낸다. 내게는 그것이 잘못된 것으로 비치니 웬일일까. 서로의 일은 잘 처리되고 업무상의 능률은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대화를 통한 서로의 감정과 표정 그리고 신의는 읽을 수가 없어서이다.일처리도 중요하지만, 인간사회에서는 인간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이에서 창의력의 조정과 격려 업무개선의 틀이 마련되고 친분이, 신뢰가, 끈끈한 정이 쌓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영학 부문에서 인간관계론이 대두 된 지 오래다. 그런데 현실은 역으로 기계적인 소통에 능숙하다. 그리고 그것으로 다인 것처럼 느끼고 부족한 점이 없다는 듯이 보여진다.
이런 것들이 필요치 않다면 로봇이 훨씬 능률적이고 비용절감이 될 것이다. 인간 상실의 위기이다. 감성이 메말라지고 있다고 하겠다. 결국 모든 주위를 차단하고 벽을 쌓아 고립을 자초하는 격이 된다.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원리와 목적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것이라고 본다. 이런 것들이 지금의 세상 모습의 단면이다. 차이는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같은 점은 있다. 가야 할 진정한 방향을 잃고 눈에 보이는 소욕이 전부인양 따라가는안타까운 모습이다. 세상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의 자리가 확고한 세상이기 때문이기도하다. 인생의 행복을 추구키 위해 온갖 일을 한다. 선한 일 악한 일 진실된 일 거짓된 일을 가리지 않으려고 한다.
각자에게 주어진 한정된 세월 속에서 무엇을 하면 쟁취하고 만족하고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삶의 목표가 이생의 것들이라면 결국은 풍요라는 말로 귀결될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발버둥쳐서 얻어진 소중한 것이라고 해도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시간이 흐르면 다 그것이 그것으로 되고 만다. 결국에는 모든 것은 세월 속으로 시간 속으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풍요도 진정한 행복과는 다르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다 그런 것이다. 눈에 보이는 행복과 영화를 위해 달려가는 인생의 모습들이 바로 버스 안의 풍경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그 모습 속에서 가야 할 길과 목적이 너무나 사실적으로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실감하고 있는 것일까. 철학을 통하여 추구할 가치와 영원의 세계를 추상적으로 알고들 있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엄연하게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며 사는 이들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진다.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다른 것은 꿈과 목표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꿈과 목표가 사는 동안의 미시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인간이 이 세상에 있게 된 참된 동기와 목적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세상에서 공급되어지는 현실를 쫓다가 보니 바쁘다. 그러기에 우리는 진정한 우리의 뿌리를 찾을 필요가 있다. 세상의 유행가에도 인생은 나그넷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참 인생의 꿈과 목표가 설정될 수 있지 않은가. 그러기에 하나님을 아는 자는 복이 있다. 참된 길을 알고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안에서도 개중에는 안타깝게도 헤매고 있는 모습들이 보인다.
우리는 참된 삶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가야 할 참된 길을 알게 해야 한다. 복음의 성취이다.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 살도록 하신 하나님의 목적이다. 고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복이다. 인간의 원형으로의 복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