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규 장로
주를 믿는 우리에게 “죽었다”함은 오히려 살아있다는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죄로 죽어 장사되었고 예수님이 부활 하시므로 새 생명을 얻어 주님과 함께 영생하게 되었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죽었다”는 것은 개념적인 것이 아니다. 교리적인 것뿐이 아니다. 오히려 주와 동행하며 영생하는 사실적이고 체험적인 실체이다 (갈2:12,20,24).
“죽었음”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해 온전히 성경을 깨닫고 말씀이 나의 레마로 역사할 때 사실의 사건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교리적으로 치중하여 배웠고 세례(침례)를 예식적으로 치렀기에 많은 이들이 그냥 지나쳐 개념적으로 알고 있음을 발견케 된다. 너무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만 들게한다.
우리에게는 늘 허상과 실상이 overlap 되고 있다. 우리가 보고 알고 느끼며 부딪치며 사는 이 세상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새로움도 지속되지 못한다(전 1:1-11). 언젠가는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기에(계20;11) 실체로 보이나 사실은 허상이다. 이러한 허상속에 있는 우리 자신, 우리의 삶도 허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실상으로 여기고 살고 있는 것이다. 속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이세상을 떠날때 그간 이루어 놓은것 중 가져가고픈 어느 것도 가져갈수 없는 허망스러움 뿐이라는 것으로도 알 수있다.
반면 주를 믿는 이들에게는 눈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분명하게 알고, 느껴지는 바라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으로 그들에게 다가오는 영원성을 지닌 소망의 실제가 있다(계 21:1,27). 이 세상이 헛되다는 것을 깨닫고 주를 믿고 따르므로 영원히 존재하는 구원과 부활과 의와 영광과 영생이 바로 그것이다. 보이기에는 허상인 것 같으나 영원히 실존하는 하나밖에 없는 실상이다. 우리는 이 실상에 붙들려 살고 있어야 한다. 곧 주님과 동행하는 삶. 세상과 구별되고(거룩) 정결한 삶으로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에 거하고 있어야 함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죽었다”라고 하는 실체로 사실은 영생의 산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옮은 행실을 말한다. 주의의에 입혀진 의, 충성, 신실, 주를 위한 삶이 일생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삶이다. 나는 죽고 주만 나타나는 삶인 것이다. 이해하기 쉽게 간단한 예화를 인용한다. 신장이 심각한 상태에 이른 환자가 있다. 의사는 소금기 없는 음식과 채소를 처방해 주었다. 그때부터 그는 치료를 위해 의사가 준 처방대로 소금기가 전혀 없는 식단을 철저하게 지키며 타협하지 않고있다. 짧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깨달아야 할, 가야만하는 길을 가르친다.
지금 이 환자의 의식과 행동을 주가 지배하고 있는 것일까? 내 자신일까 아니면 의사일까? 의사인 것이다. 의사의 말을 따르는 순간, 환자는 자기 의사를 포기한 것이다. 오직 의사의 처방이 환자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요3:16). 겉으로 볼 때는 여전히 환자가 스스로를 컨트롤하는 듯이 보이지만 허상일 뿐 실상은 의사인 것이다. 여기서 의사는 주님인 것을 지칭한 것으로 주의 뜻대로 사는 삶을 가르친다.
우리에게 이 세상의 허상과 주가 주신 실상이 오버랩 되어 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과연 우리의 모습, 우리의 진정한 삶은 어느 쪽에 있는 것인가? 우리는 실상인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말씀대로 살아가야만 한다. 강조하지만 이것이 “죽었다”고 말하는 실체이다. 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 영원히 영생할 수 있는 산 삶인 것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진정으로 왜 이리 살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실상인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말씀대로 살아가야만 한다. 강조하지만 이것이 “죽었다”고 말하는 실체이다. 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 영원히 영생할 수 있는 산 삶인 것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진정으로 왜 이리 살지 못하는 것일까? 주님에 대한 신뢰와 절대성의 결여에서 알게 모르게 밀려드는 죄 많은 세상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세상에 찌들어 있다. 탈바꿈이 되지 않고서는 항상 실상과 허상 오락가락하게 된다. 이는 시간 낭비이자 불신앙이다.
영원한 소망을 성취하기가 힘들다. 앞서 말한 환자와 같이 철저히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만 실상대로 살 수 있다. 허상인 죄와 세상을 버려야한다. 얼마나 힘겨운 일이면 사도 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고 이 싸움의 처절함을 토로했을 정도이다. 우리는 매일 같이 죽었나하면 벌떡 살아있는 자신과 싸워 매일 죽는 싸움에서 죽어야 한다. 그래야 실상속에서 현존하는 하나님나라에 거하게 된다. 이 때 실상인 영원한 소망을 이룰 수가 있다. 이 출발점은 바로 “죽었다”는 실체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고로 과연 우리가 “죽었다”는 실체로 존재하고 있는가를 곱씹어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