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 Column

– 49번째

By October 17, 2017No Comments

El Shaddai (엘 샤다이)

김대규 장로

엘 샤다이. 가장 마음에 와 닿는 거룩한 나의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다. 주어진 깊은 의미와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 그리고 그 은혜를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도록 피조물인 내 쪽에서 지켜야 할 것들, 한마디로 아름다우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행복한 관계의 흐름이 이 이름 속에 있다.

“엘(EL)”은 능력있다. 강하다는 의미로 권능의 원천이 됨을 말한다. “샤다이(SHADDAI)”는 충분하다. 자족하다의 의미로 전능자임을 나타낸다. 문법적으로는 “하나님은 나의 가슴이다” 라는 뜻으로 아기에게 가장 소중한 어머니의 품과 젖처럼 하나님은 내게 모든 필요를 풍성히 공급해 주실 뿐만 아니라 보호하시고 양육 변화시키시며 복을 내려 주시는 분이심을 말한다. 불가능한 것까지도 가능케 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더 나아가 구속과 구원과 영생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되심을 나타내는 것까지도 포함된다고 본다.

엘샤다이(전능의 하나님)는 창 17:1에서 나온다. 99세된 아브람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EL SHADDAI)이라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과 같이 무한하게 완벽하라는 뜻이라기보다는 매사에 믿음 위에 서서 흠없이 온전하게 되라는 메시지이다.

왜 완전하라고 하셨을까? 그동안 완전치 못했기에 그러셨던 것이다. 아브람이 처음 하나님을 만나 말씀하신대로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간 것이 75세 때였다. 이때 하나님은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언약을 주셨다 (창 12:2,3). 여기서 복이라 함은 영적인 축복을 말한다. 왜냐하면 메시야가 그의 후손으로 만인에게 구원과 영생의 복을 얻게 하신데 비롯된다.

엄청난 언약을 받고도 가나안 땅에 기근이 생겼다 해서 하나님께는 묻지도 않고 인간적인 바람에서 세상의 땅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쭟겨난 일, 목숨을 구하고자 아내를 누이로 속이고 거짓과 위선과 이기적이었던 일, 믿음으로 의로움을 받고서도 횃불의 언약(창 15:17,18)을 붙잡지 않고 10년을 기다려도 자식이 없다고 아내의 말을 들어 여종을 통하여 자식을 얻은 일. 모두가 믿음에 합당치 않은 세상적이고도 자기 생각대로 저지른 일들이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니었다. 이런 일들로부터 온전하게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셨던 하나님은 첫 언약이 있은지 25년째 되는 해 99세된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언약을 세우시며 아들을 낳게 하고 그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시겠다고 하셨다(창 17:4-16). 그러나 믿지 못한 아브람과 사래이었다(창 17:17,18:12).

하나님은 이런 아브람을 버리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변화되기를 기다리셨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결국에는 모든 것에서 빗나간 아브람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은 변화를 주관하게 되신 것이었다. ‘나는 엘 샤다이. 너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보호하고 절망의 때에 너를 건져내는 너의 엘 샤다이. 내가 주는 것을 받아 누리려면 너는 온전해져야 해. 나는 언약을 이루는 엘 샤다이. 너의 하나님이야’ 라고 말씀하며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고, 그의 아내 사래를 사라로 열국의 어미로 세워 믿음의 조상으로써의 삶을 살게 하셨다. 할례를 통하여 새 생명의 정결과 언약의 표징이 되게 하시고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아들 이삭을 태어나게 하여(창 17장, 21:1-7) 그 후손인 ‘여자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루게 하신 것이다.

이 모습이 바로 나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참 모습이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내 곁에서 나의 잘못을 바라보시며 깨닫고 돌이켜 온전케 되어 믿음으로 나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다. 나는 아브람의 모습에서 믿음대로 산다면서도 헛도는 내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완전해지라는 말씀에 힘을 얻는다.

아무리 믿음이 있다 해도 죄인이기에 결함이 있다. 믿음으로 행한다고 외치면서도 내 능력, 내 생각, 내가 원하는 길이 옳다고 간다면 그것은 곁길로 가는 것이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주의 뜻에 맞지 않으면 응답이 없다. 마치 침묵으로 아브람을 바라만 보셨던 것처럼 기도의 응답이 늦어진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목적을 성취한들 사람의 눈으로는 그럴싸하나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허사이다. 내 방식대로 믿는다 하면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실 수 없다.

그러나 회개와 정직과 성결로 성령님을 의존하고 순종하므로써 모든 초점을 하나님께 맞출 때 하나님은 나의 영육간의 필요한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신다. 아낌없이 베풀어 주시며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신다. 불가능해 보이던 것들을 이루어 주신다. 절망과 위기 속에 찾아오신다.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이 참 믿음에 서서 이삭을 번제물로 받치는 경지에 이른 것처럼 믿음으로 온전해질 때 하나님은 마음에 합한 자가 되게 하신다. 어린애가 어머니의 품안에 안겨 평안과 행복을 누리듯이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하여 온전해질 때 세상적인 풍요로움이 아닌 옹달샘과 같은 풍성한 영육간의 복으로 언제나 하나님의 끈을 놓치지 않게 하신다. 나를 꼭잡고 지켜주신다. 바로 나의 엘 샤다이는 이런 분이시다. 그러기에 내게는 부족함이 없다고 행복을 노래한다(시 23편). 나의 아버지 엘 샤다이는 전능자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