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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분단상 121-10월호 >

By September 28, 2023October 6th, 2023No Comments

예레미야서가 주는 교훈

                                                                                                                                                                           
– 김대규 장로

예레미야는 숱한 역경과 오해와 모함에도 아랑곳 없이 하나님의 예언적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한 제사장 집안의 선지자였다. 유다의 마지막 5왕을 섬기며 40년간 고뇌속에 배역한 현실을 보며 눈물의 선지자로 타락한 백성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호소하였다.

타협없는 그의 고직한 하나님의 메시지로 오히려 의심과 비난과 죽음의 위기까지 있었던 그였지만 유다왕국의 종말로 주님이 주신 메시지가 옳았음을 확증하였다. 그의 이름이 주는 의미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높이 세워 쓰셨다.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우상숭배와 거짓 예배와 음행으로 하나님께 불순종과 죄악에 젖은 유다를 향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었음을 깨닫고 회개하도록 촉구하며 돌이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전한 것이다.

예레미야가 대언한 예언적 말씀은 타락과 심판이 주를 이루었기에 현실안주에 급급한 왕과 백성들의 귀에는 들리지가 않았다. 안타깝기만 한 일이었다. 이런 모습이 오늘날과는 상관이 없는 한낱 옛 이야기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왜 예레미야서를 배워야 하는지 그 의미를 상실케 된다.

이 예언서에서도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 끝까지 이스라엘을 지켜 나가시고자 하신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우상 숭배와 불순종이라는 죄에 대해 심판으로 나라가 망하고 70년의 긴 세월동안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벌을 주셨지만 벌이 목적이 아니라 사랑이시기도 한 하나님이시기에 회개케 하시고 회복의 기회를 열어 주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것이 이 예언서의 핵심이다.

더욱이 새 언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강림으로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셨다. 옛 언약이 돌판에 새겨진 율법적인 성격을 띤 외형 부분이 주가된 것이라면 새 언약은 진정한 변화가 가능한 인간 내면의 “속”에 촛점을 두었다.

곧 마음속에 성령이 임하여 인격적인 변화를 받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향한 삶으로 바뀌어지는 구원의 역사가 있게 하는 영원한 언약을 의미한다. 이렇게 언제나 회개하고 돌아와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낸 것으로 이런 은혜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심을 발견케 된다.

예레미야서는 이런 하나님께 지금 우리에게도 전적인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혹시라도 내가 정해놓거나 습관적인 우선순위에 따라 하나님보다 앞선 것이 있다면, 세상의 원리에 따라 우선적으로 합리성을 추구한다면 이는 우상숭배이요, 불순종이므로 유다 백성과 다를 바가 없다.

또한 예레미야는 자신처럼 우리에게도 의와 성결과 거룩의 삶을 요구하고 있다. 마치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주를 믿는 믿음으로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라는 명령과도 같다.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흘러가는 대세와 타협치 않는 신앙이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세속화된 값싼 믿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짜 선지자들을 통하여 깨닫게 한다.

예레미야는 공동체의 슬픈 현실에서 올바른 교회란 무엇인가를 신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고뇌하였다. 이고뇌의 답은 알면서도 지금도 고뇌는 이어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고루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진리는 불변하기에 이를 고수하고 변절치 않는 믿음으로 반드시 지켜 나가야 함을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통하여 강조하신 것이다.

이것이 답이다. 문제는 이를 행하지 않는데 있다. 문제는 다름 아닌 내 자신에게 있다. 알면서도 행치 못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속에서 무엇이 내 문제인지를 충분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할 수 없어서 아니면 세상을 놓지 못해서 인가. 내 발목을 붙잡고 있는 그 원인을 과감하게 내쳐버려야 한다. 내가 영원히 살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보지 않고 하나님만을의지하고 바라본 예레미야를 선택하셨고 예레미야는 그렇게 살았던 것이다. 고독한 그를 끝까지 세워 쓰셨고 어떤 위기에서도 보호해 주셨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과 같이 높이어 세상 끝날까지 그를 선한 대선지자로 남게 하셨다. 우리도 이리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누구에게나 내일이 있지만 하나님이 허락해 주실 때의 말이다. 솔직히 말해 보장받은 것은 지금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확실하게 주어진 지금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결단해야 한다. 우리의 영원한 미래는 여기서 결정된다.유심히 유다 백성을 보라. 현실에 묶여 살았던 자들을.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