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이 땅에서 떼어 질수 있도록
김대규 장로
불원간 우리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의 발이 그냥 땅에 붙어 있거나 아니면 땅에서 떼어져 들려 올라가게 된다. 이를 실감 있게 사진으로 설명해 보았다. 이 차이는 엄청난 것으로 천국이냐 지옥이냐의 우리의 영원을 의미한다.
그토록 시끄럽고 요란했던 세상에서 요즘 코로나19 때문에 해결될 수 없던 일들이 이루어지거나 생각지도 못한 일도 생겨 기존 양식으로는 적응키 힘든 현실이 되었다. 보이지도 않는 세미한 것 때문에 정지되거나 새롭게 되어져서 초호화판 문명도 우스워지는 상황이다. 이것이 피조물로서 인간의 한계인 것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지나가는 현상들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과정이기에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는 이를 통하여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의 메시지를 읽어야 한다. 그리고 깨닫고 따라야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이요. 생사화복은 주에 속한 것으로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우리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초점은 언제나 하나님께 두어야 한다. 현실의 답도 하나님께 구하고 얻어야 한다.
성경은 다니엘서, 스가랴서, 마태복음, 로마서, 고린도전서, 데살로니가전서,베드로후서,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세상의 끝을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끝까지 인내하며 믿음의 절개를 지켜 나가는 것이다(마29:13,계7:14). 세상과의 타협이나 합리성이 아닌 절대성의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믿는 자는 환란을 당하나 진노는 당하지 않는다고 했다(마24:29-31,롬5:9). 이는 우리가 환란을 거쳐야 된다는 말이다. 지금보다도 더 큰 기근 역병 환란이 있을 것이다(마24:9). 놀라거나 근심할 것이 아니라 이에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러기에 요한 계시록에서 구구이 많은 설명을 한 이유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믿는 자들은 환란기를 당하지 않고 휴거를 한다고 생각한다.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이는 4가지 학설인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역사주의적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의 하나로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의 학설이다. 신학상으로도 어느 하나 정설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 4학설 중 세대주의만이 공중 재림과 지상 재림의 2회성을 말하며 환란기전에 성도의 들림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 외의 학설은 환란 후 한번 주의 재림이 있다고 한다. 어느 것이 옳은가 혼란 스럽기도 하다. 시원한 정답이 없으니 말이다.
또한 성경의 해석에도 여러 가지가 있으나 기독교 초기부터 역사적 성경 해석이 전통적인 것으로 보는데 19세기 때 John Nelson Darby로부터 시작된 세대주의 신학이 등장하였다. 성경과 교회의 역사를 7시대로 구분하여 그 시대마다 하나님의 통치의 원리가 다르고, 백성을 구원하는 방법도 다르다고 하는 견해의 신학이다. 종교개혁의 맥을 따르는 역사적 성경해석과는 다른 입장으로 유일하게 대환란 전의 휴거설이 나왔다. 이외에도 환란 중간에 들림, 환란 후에 들림이 있다는 등 여러 주장들이 있다. 결국 주님의 재림과 들림이 언제이든 상관없이 늘 준비된 삶이 필요한 것은 틀림이 없다고 하겠다.
따라서 어떠한 학설이나 교리로 구원이나 부활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하며, 오히려 구원과 부활은 믿음으로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발견케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성경의 이론이나 학설이 아닌 성경에서 찾아야하고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어야 한다고 본다. 특히 이 땅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과 행하셨던 그의 삶에서 배우고 그 속에 거하여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너희가 내안에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요15:7)이라고 하신 것은 아닐지---.
마태복음, 요한계시록에서는 주님의 재림은 환란 후에 있을 것이며(마24:29,30,계19:11-16), 혼인잔치(계19:7-9)도 있게 될 것이라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들림도 그때(마24:31)라고 보여 진다. 환란에 대비하는 성도의 마음의 자세도 말하고 있다(마24:32-51). 이런 점을 보아서도 환란이 있든 없든 들림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러기에 주의 전신갑주를 입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순교적 믿음으로 이 세상을 이겨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곧 성육신의 삶이다. 환란이 있다 해도 요동치는 것이 아니라 담대히 믿음으로 주만을 바라보며 이겨내는 것이다(마24:9-13,요6:10,11,계7:14). 기독교 초기에도 엄청난 환란이 있었다. 지금이라고 하더라도 감당키 힘들게 보이는 네로황제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때의 박해와 환란에서도 믿음의 선조들은 신앙을 지켰다. 세상 끝날까지 환란과 역경은 지속된다.
마지막의 마지막 때에 들어선 우리는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씀(합2:4,롬1:17,갈3:11,히10:38)대로 살아야 한다고 본다.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으로 이것은 순종으로만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는 그의 은혜에 보답으로 거룩한 행실(벧전1:15)을 가져야 당연하며 또한 그렇게 살게 된다. 말씀대로 살아서 현실과의 타협, 이생의 유혹, 이생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들을 벗어버리고(요일2:16) 마음속에 감춰진 우상숭배를 쫓아내어 음행하고 가증한 자리에서 벗어나(엡5:3-5) 거룩한 백성다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벧전1:3,16, 레19:2, 요일2:17). 그래야만 하나님나라의 기업을 받을 수 있다. 더욱이 들림을 받아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정결한 신부로써 입는 세마포 옷의 의미를 옳은 행실이라고 하였다(계19:7,8). 이는 구원받은 은혜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으로 수많은 박해와 어려움 속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충성과 신실함으로 믿음을 지킨 것을 말한다(마24:13,요16:33).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인내와 신앙의 지조가 요구되는 것이다(계20:4). 이것이 들림의 요건(?)이라면 우리는 그대로 행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들림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산 소망이다(벧후3:8-13). 우리는 어떠한 역경이 올지라도 흔들리지 말고 믿음으로 인내와 신앙의 지조를 지켜 주님의 신실하고 성결한 신부가 되어야만 한다. 들림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들림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대로 사는 자들의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세상과 타협치 않고 주님을 의지하고 어떠한 환란에도 굴복하지 않으며 주님이 원하시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지켜나가는 것으로 시작된다고 본다(벧후3:11,12).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거룩은 하나님의 본질이요 하나님나라의 속성이다.
들림을 생각하자. 이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직면한 내 자신의 이야기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참된 복은 아무리 환란, 역경, 기근이 있다 해도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이 주신 현존하는 하나님나라에 거하여 의와 평강과 희락을 공급받아 누리며 이 세상을 이기고 장차 올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는 이 복을 추구하여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