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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단상 108-9월호>

By September 16, 2022No Comments

노아의 방주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것

김대규 장로

노아의 방주 (창6:14-16) 이야기는 “사랑과 구원”이 주제가 되는 종말론적인 성격의 여러 가지 메시지를 주고 있다. 핵심적인 메시지는 방주가 구원의 방주로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동체로서의 지상교회와 성도라는 개별적인 교회 모두를 의미하는 것으로 교회의 성격과 역할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개념을 아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의 문제점을 개선하여 옳은 방향으로 나가라는 가르침이 강조되어진 마치 옷매무새를 고칠 수 있는 거울과 같은 메시지가 노아의 방주 이야기이다.

타락한 세상은 사탄의 죄 덩어리가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튕겨 나가 창조하신 것을 후회하신 정도였다. 그래서 대홍수라는 심판으로 멸하려고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악은 징벌하셨지만 의인인 노아를 보시고 방주라는 제한된 구원의 역사를 이루게 하셨다. 이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전개될 마지막 심판의 모형인 것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세대의 모습이 바로 노아와 롯의 때와 같다고 하셨기 때문이다(눅 17:24-30).

어차피 이 세상은 사탄이 휘저어 놓은 죄로 타락하였기에 멸하기로 하나님은 정해 놓으셨다. 그런데 이것을 알면서도 세상을 즐기거나 놓지 못한 세속화 된 성도들이 너무 많다는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화되었고 들림을 받는다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현실적 사실이 당혹스럽기만 하다(계3:1). 한마디로 스스로에게 속고 사는 이들이, 십자가를 잡았다고 하지만 놓치고 쉽게 사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이를 하나님께서는 어찌 보고 계실까?  우리는 방주의 이야기에서 진실된 자아를 찾아야 한다. 참된 영원에 이르기 위함이다.

우리에게 가장 기초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반드시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세상과 벽을 쌓는 것이다. 세상의 것이 내 안에 들어오지 못도록 차단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내 마음에 역청을 안팎으로 쳐 바르는 것이다. 공동체인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거룩하게 되기 위함이요, 살아남아 들림을 받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방주에 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물 위에 뜰 수가 있는 이치와 같다. 그래서 방주에 역청(pitch)을 바른 것이다.

역청은 히브리어로는 토페르(kopher)인데 “덮는다”는 뜻으로 “속량” “속죄 (atonement)”를 의미하는 것으로 속죄제물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다. 구원은 오직 속죄제물이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것임을 역청을 바른 방주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바로 주님이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요14:6)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가 된 것이다.

고로 우리는 주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가야만 한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길이기 때문이다. 타협은 없다. 그런데도 세상을 버리지 못한 경우가 주변에 너무 널려 있어 넘어질 정도이다.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교회에 세상의 것들이 너무나 많이 들어와 잠식하고 있다. 현대교회들의 맹점이다. 세속적인 것은 분명 타락이다. 역청의 역할은 방수이다. 영적으로는 주의 보혈이며 이에 따른 우리의 믿음을 말한다. 주의 보혈을 의지하고 참 믿음 위에 선자는 아무리 홍수가 몰아쳐도 상관이 없다. 푯대를 향해 달려갈 뿐이다.

영적으로 성화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바닥층으로부터 한 걸음씩 발을 띠어 2층을 거쳐 3층에 이르러 하늘을 향한 창문을 열므로 비둘기가 감람나무의 새 잎을 가져온 것처럼 하늘의 소망의 성취를 바라보는 자, 방주의 문을 다시 여는 자가 되어야 한다. 구원의 언약을 일곱색 무지개로 소유한 자, 주의 뜻대로 순종하여 방주로 살아남은 자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된다. 하나님이 통치하는 현존의 하나님 나라에 거하게 된다. 하나님께 속한 자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결코 세상에 물든 자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노아의 방주가 우리에게 주고자하는 메시지가 이것이 아닐까. 역청으로 보호막을 친자는 언제나 믿음과 순종으로 거룩하고 성결케 되어 올바른 행실을 하게 된다. 이것이 주를 맞이할 신부의 단장이다(계19:8). 이러한 자는 성결한 세마포의 예복을 입고 결혼잔치에 참예한다. 이는 구원의 완성이며 주와의 영원한 연합인 것이다. 어린 양의 혼인잔치는 천국에서 영광 중에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아의 방주라는 거울에 내 자신을 엄밀하게 비춰 보아야 한다. 은혜의 방주 이야기가 내게 준 메시지는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할 우리이다. 노아의 방주는 우리에게 역청을 바르라고 쉬지 않고 손짓을 한다. 그 손짓이 우리에게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사랑의 손짓이 되어 가슴 속에 있어야 우리는 살 수가 있다.